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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방, 당신은 누구세요?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 최치원(崔致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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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열심히 노력하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자녀가 있나요? 저 역시, 학창시절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속상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였어요. 그런 자녀들에게 최치원 선생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까요?


최치원 선생은 신라시대 학자이자 문장가였어요. 높은 학문적 지식을 지녔지만 신분제 벽에 가로막혀 불행한 생을 마감한 인물이지요. 최치원 선생의 생을 함께 이야기 나누다보면, 자녀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 같아요.
이제부터 이야기 여행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12살에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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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는 한창 중국 당나라 유학이 유행했다고 해요. 837년 한해에 당나라로 건너간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였어요. 왜냐하면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 제도 때문인데요. 6두품으로는 최고직이 6등급 아찬 이상으로 오를 수 없는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많은 6두품 자제들이 당나라 유학의 길을 선택했지요.


최치원도 어린 12살의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12살이라 하면 아직도 어린 나이었지만 최치원의 아버지는 유학길에 오르는 최치원에게 ‘10년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최지원은 결국 유학 6년만인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습니다.  그것도 1등인 장원으로 말이죠.^^

 
★여기서 잠깐!! 빈공과(賓貢科)란 ?
손 빈(賓), 바칠 공(貢), 과정 과(科) 자를 써서, 손님 즉 외국인(賓)에게 주는(貢) 과거시험(科) 이란 뜻으로, 당나라에서 유학생을 대상으로 치러진 과거 시험을 말해요. 자기 나라 사람도 아닌 외국인을 대상으로 과거를 치르고 관직을 주다니, 참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것 같아요. 그런데 대우는 좀 좋은 편은 아니 였다고 해요. 합격자 명단도 빈공과는 과거시험 가운데 맨 아래 표시 되어 있다고 하니 말이죠.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 최치원이 남긴 명문

  

최치원은 과거 합격 후에 관직에 올랐는데요. 그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 났어요.

소금 장수인 황소(黃巢)가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자, 최치원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칠 토, 누를 황, 집 소, 바로잡을 격, 글 문 : 황소(黃巢)를 꾸짖어(討) 바로잡는 글(檄文) )’을 썼는데요.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남는 아주 유명한 글이에요. 이 글로 당나라에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죠.


중국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허가한 외국인 기념관인 최치원 기념관이 있을 정도이니, 최치원이 중국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 잘 알 수 있을 듯해요.

고향이 그리워 고국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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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해외에서 일주일만 지나도 고추장과 된장 등 우리나라 음식이 그리워지는데 여러분도 그런가요?

최치원도 마찬가지로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최치원도 그동안 당나라에서 배우고 익힌 것을 토대로 뜻을 펼쳐 보려고 힘썼어요. 하지만 당시 신라시대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어요. 


최치원은 진성여왕께 시무10조(時務十條/ 때 시, 힘쓸 무, 열 십, 가지 조 : 급선무로 시행하여야 할 시국대책 10여 조항)를 올려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개혁하고자 하였지만, 중앙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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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펼치고자 했던 것들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최치원.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존재했을 것이고, 신라에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있어서 신라시대 최고의 천재 최치원은 해인사에서 은둔을 결심하게 됩니다. 큰 인재 최치원을 국가에서 뒷받침 해 주었다면, 우리나라는 또 다른 모습이 되어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최치원이 큰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인 것 같아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적어도 신분제의 벽이나 유학생활의 한계는 없을 거예요. 지금이라도 자신의 뜻을 멋지게 펼쳐 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 아이들이 최치원의 이야기를 듣는 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한 투정은 사라질 것 같네요. 뭐든지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으니까요!

 

 

 [출처]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 최치원(崔致遠) (*다락원 공식카페* 외국어 때문에 골치 아픈 수많은 사람들!)    |작성자 다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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